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1 전차 (문단 편집) === 양산 시작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azbQd6DH3E)]}}} || || '''1987년 9월 18일 열린 88전차 명명식'''[* 1987년 9월이면 이미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5공이 끝나버렸지만, 대통령 선거는 그해 12월 차기 대통령의 취임은 내년인 만큼 우선은 당시 국가 수반이던 전두환이 명명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K-1 전차의 개발 시작이 1970년대임을 생각하면, 제 5공화국의 수명보다 개발 기간이 길었던 셈. 사실 전차, 그것도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독자 전차인 만큼 그만큼 걸리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물론 박정희 때 개발을 시작해 이명박때 초도양산을 끝낸 [[아준 전차]]는 비상식적인 것이 맞다.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정부요인 및 김영삼 총재 등 야당 정치인, 한국 주재 해외 무관들, 언론사까지 대대적으로 참석한 88전차 명명식은 수도기계화사단(사단장 [[조남풍]] 소장)에서 성공적으로 시범을 완수.] || 1984년부터 개발이 완료된 직후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987년 9월 18일에는 육군 승진 사격장에서 성능 시범과 함께 실전배치되었다. 전차의 명칭에 대한 내용은 아래 명칭 부분에서 설명한다. 명명식과 성능 시범에서 K-1 전차는 연막 차장으로 인해 육안으로는 표적을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속기동을 하면서 표적을 정확하게 명중하는 등 종전의 육군 전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성능에 참관인들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성대한 생일잔치를 치른 후 K-1 전차는 1000여 대가 1984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생산되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을 시작으로 육군의 [[기계화보병]]사단과 [[기갑]]여단에 배치되었다. 1992년부터는 해병대에도 배치가 시작됐으며 약 60여 대의 전차가 양산돼 일선부대에 배치되었다. 해병대가 보유하고 있는 K-1 전차의 성능은 육군형과 동일하다. K-1 전차를 해병대가 장비하면서 이를 탑재하여 운반하는 [[대한민국 해군]] [[전차상륙함|LST]]들도 K-1 전차의 진출입에 용이하게 개조됐다. 해병대가 K-1 전차를 전력화한 것은 미 해병대가 M1A1(HC)를 전력화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륙부대가 단지 상륙하여 교두보 확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교두보 확보 이후 전과 확대를 위해 내륙으로 진공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